문화살이 게시판(책, 음반, 전시회, 공연등)

 
작성일 : 02-08-08 00:54
spiriting away sen and chihiro(영화평석)
 글쓴이 : saint
조회 : 1,350  
안녕하세요. 오늘 새벽에 가입한 saint 입니다.
어제 친구(전진우) 만나러 커피나무 갔다가 거기서
사장누님을 만나 이까페를 알게되었습니다.
자기소개를 할려했는데 글쓰기 권한이 없다는군요.
운영자님! 제게 권한을 주십시요.^^
어제 사장누님과 집에 내리시기 막판에 이 영화 애기가 나와
평론을 말씀 드렸는데 시간이 짧은 관계로 평론원문을 싣습니다.
길더라도 읽어보시고 영화보시면 더더욱 도움이 되실거예여.
우리말로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인데 영어제목과 일본어를 보면
"정신이 나감"의 의미인데 아마도 "정체성 상실"로 번역할 수
있겠는데요...아니나 다르까 이 영화의 메시지와 일맥상통합니다.
자! 그럼 20000.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千と千尋の神隱し)'은 미야자키 하야오가 만든 이전의 작품보다 매우 잘 짜여진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상을 받을만한 작품을 만들기 위해 매우 노력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짜여짐은 상대적으로 그 짜여짐의 기법과 수법을 알고있는 이들에게는 약간 지루한 면을 준다. 이런 점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일반 독자들이 느끼는 환상적인 분위기와 흥미있는 줄거리 그리고 만화 작가들이 주로 보는 세밀하고 다양한 구도와 시점, 장면 설정, 미장센, 플롯 면에서 매우 탁월하다.

그러나 여기서 다시 한번 생각해야할 것은 이 애니메이션을 통해 일본인들이 고민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이다.

하야오의 작품들은 이제 문화 복합 기호 측면에서 보더라도 서구문화 기호들을 과감하게 버리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면서 상대적으로 일본 문화기호를 전면에 포진시킨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일본 근현대사를 단적으로 증명하는 것이다.

일본만큼 서구를 따라간 나라는 없다. 그 결과로 그들은 아시아에서 서구 국가와 필적할만한 기량을 갖게 되었다. 그럼에도 정체성과 가치관의 혼란은 피할 수 없었다.

이러한 고민과 혼란은 확실했던 것으로 기억되는 과거에 대한 문화 향수를 불러온다. 우선 하야오는 형식에서도 일본문화기호를 이제 전면에 내세우면서 정체성을 확립하려 하고있는 것이다. 그것은 비단 닫힌 정체성이 아니라 열린 정체성이다.

치히로(荻野千尋)는 아버지, 어머니와 함께 이사한 집에 가던 도중에 길을 잃게 된다. 아버지가 운전하는 차는 성문에 도착하게 되고 터널을 통과하기로 한다.치히로는 전혀 가고 싶지 않았지만 부모에게 이끌려 가게 된다.

치히로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터널을 통과하게 된다. 치히로는 어머니의 손을 잡고 공포에 떨면서 앞장선 아버지를 따라서 굴을 통과하게 된다. 그것은 새로운 세계에 대한 진입이다. 굴을 통과해서 뒤돌아보고서야 그것이 일본전통의 낡은 성문임을 알게 된다. 그것은 단지 낡은 테마파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공적으로 재현된 전통의 상징임을 말해 준다. 치히로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음식냄새 이끌려 깊숙하게 들어간다. 먹음직스런 음식이 잔뜩 쌓여 있는 그곳에는 사람이 하나도 없고 적막하다.

치히로는 그러한 분위기에 공포감을 떨치지 못하고 돌아가고자 졸라댄다. 그럼에도 부모는 주인이 없는 음식을 우선 먹고 본다. 여기에서 푸짐한 음식은 가장 기본적인 욕구를 자극하고 부모는 여기에 정신없이 빠져든다. 결국 돼지가 된다.

돼지는 가장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상징성을 가지는 것이 보통이다. 게으르고 먹을 것을 밝히면서 시간만 나면 잔다. 그러한 여건을 제공하는 이들의 포로가 되고 결국 그러한 여건의 제공자의 식탁에 오르게 된다. 치히로의 부모는 언제 도살될 지 모르는 마녀의 돼지가 되는 것이다.

치히로는 그러한 욕구에 빠져들게 하는 기제, 즉, 음식을 거부함으로써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상태, 자율성을 유지한다.

그럼에도 위험은 항상 존재한다. 하쿠(ハク)는 이를 맨 처음 알게 해주는 존재이며 그러한 위험에서 벗어나게 해주려는 인물이다. 뿐만 아니라 돼지가 되어버린 부모를 찾아 이 세계에서 벗어날 수 있는 희망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치히로가 가기 싫어서 억지로 끌려서 들어간 세계는 무엇인가? 여기에서 치히로는 일본인을 구성하는 새로운 세대이다. 그들이 기성세대의 손에 이끌려 어쩔 수없이 가게되는 세계는 별로 마땅치 않은 곳이다. 부모로 상징되는 기성세대는 비판의식과 감각적인 숙고가 부족하다. 결국 그들은 욕구를 충동질하는 기제, 음식에 빠져들면서 인간이 아니라 동물이 된다. 이는 인간 본성의 파괴를 의미한다.

하야오는 그 기성세대들과 새로운 세대들을 분리하고 새로운 세대만의 탈출만을 꿈꾸는 것이 아니다. 치히로는 부모를 구출하기 위해서 하쿠의 말을 따르게 된다.

치히로가 본격적으로 그 세상을 인식하게 된다. 그곳은 목욕여관 정도로 번역될 수 있다. 목욕 서비스는 물론 각종 공연과 연회, 음식이 제공되고 때에 따라서는 여종업이 접대를 하기도 한다. 그곳은 기본적으로 욕망의 찌꺼기들을 배출하는 곳이고 이 대가로 돈을 내야 한다.

이 세계는 자본주의를 그대로 모사해 놓은 것이다. 그런데 이곳에는 인간은 들어갈 수가 없다. 오직 귀신들이 이용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또한 인간의 모습이 아니라 인간의 냄새 즉, 인간의 본성을 가지고 있는 이들은 들어갈 수 없다. 철저하게 인간임을 포기해야 한다. 치히로가 숨을 쉬지 않고 위장을 해야 했던 이유이다. 자본주의는 철저하게 인간성 파괴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부모를 구출하기 위해서는 일단 위장 취업이 필요하다. 취업을 위해 하쿠의 안내로 찾아간 카마지이(釜爺)는 일본 노동자의 전향을 그대로 나타내준다 인간과 세계에 대한 나름대로의 깊은 가치관과 식견이 있음에도 하층에서 혹사 당하는 모습을 그를 통해 그려진다. 그의 쉼없이 일하는 데 쓰이는 수많은 팔은 기계로 전락한 노동자의 현실을 상징적으로 나타내준다.

그곳에서 유바바(湯婆婆)에게 안내해 줄 여종업원 린(リン)을 만나게 된다. 그녀는 치히로에게 단번에 촌스럽다고 말한다. 이것은 자본주의의 성격을 단적으로 말해주는 것이다. 언제나 새롭게 진입하는 이들에게 자본주의는 촌스럽다고 말한다. 자본주의는 언제나 새로운 유행과 상품을 만들어내고 이를 상대적으로 가지지 못한 이들에게 촌스럽다는 딱지를 붙이면서 자신들의 세계로 재빨리 뛰어 들어 일원이 되라는 위세를 부린다. 질서인이 되기 위해서는 열심히 일해야 한다.

그렇다면 이 자본주의를 실질적으로 통치하는 자는 누구인가? 여기에서 목욕여관은 그 성격상 일본체제를 상징한다. 따라서 일본 자본주의를 의미한다. 유바바는 이 목욕여관을 지배하는 마녀이다. 그런데 왜 마녀인가?

유바바의 등장 이전까지 문화기호는 온통 일본 일색이었다. 그런데 유바바는 서구문화기호의 상징이다. 방안 장식,의상, 크고 파란 창백한 피부, 매부리코, 금발의 머리는 분명 일본의 상징이 아니라 서구를 상징하는 문화 기호이다. 그것은 현재 일본자본주의 사회가 자신들의 정체성이 아니라고 보는 것이다. 일본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서구에서 건너온 마녀 같은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인 것이다.

치히로는 자본주의의 포로가 된 부모를 구출하기 위해 계약서를 쓰고 그곳에서 일하게 된다. 계약서는 새로운 현대판 노예증명서가 된다.

그러한 마녀 이데올로기는 어떻게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 그것은 카오나시(カオナシ)라는 얼굴없는 귀신을 통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카오나시는 목욕여관에 들어오지 못하고 방황을 한다. 그런데 치히로가 들여보내 준다. 이러한 관심과 대접은 카오나시에게 매우 큰 감명을 준다. 그는 매우 외롭고 고독한 존재이다. 강의 신이 남긴 사금을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을 보고 사금을 통해 외로움과 고독을 해소하려 한다.

여기에서 사금은 돈을 의미한다. 그는 돈을 통해 음식과 유흥 그리고 사랑도 사려고 한다. 고독을 해소하기 위해 소비를 통해 비고독 수단을 소유하려 한다.

사람들은 이 사금을 얻기 위해 엄청난 경쟁을 하게 되고 카오나시는 이를 즐긴다. 그 사금은 실제 가치, 노동과는 상관없는 마법과 같은 현대 금융자본의 투기 이익과 비슷하다. 이 사금을 뿌리면서 카오나시는 고독과 외로움이 해소된 것으로 여긴다.사람들에게 사금을 주는 한 그들은 자신에게 관심을 가져주고 대접이 융숭하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러한 허상은 치히로의 말에서 깨어진다.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사람들이다. 그들의 생활은 매우 전통적이고 인간적이다. 같이 일하고 같이 먹고 같이 잠자는 공동체의 모습, 현재와 다른 과거 일본 사회의 모습이다.
이는 매우 일본적인 필치로 그려진다. 마녀 유바바의 생활은 홀로 애완견 같은 아이를 키우는 서구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에서 극단적으로 대비된다. 그렇게 인간적이고 일본 공동체의 성격으로 잘 드러내는 사람들이 사금 앞에서는 탐욕스럽게 변하는 것이다.

치히로는 카오나시에게 내가 바라는 것을 사금으로 살 수 없다고 말함으로서 카오나시의 허구적인 환상을 깬다. 고독과 외로움은 돈으로 해결될 수 없다. 그럼 무엇으로 극복될 수 있는가?

맨 처음 치히로가 맡은 일은 썩음의 신이라고 모든 이들이 피한 불린 강의 신을 씻기는 일이었다.자본주의 사회는 자신들의 영리와 이익을 위해서 재빠르게 행동하는 이들의 천국이다. 상대적으로 성실하고 힘없는 사람들이 온갖 궂은 일을 다하게 된다. 치히로는 그 썩음이 진동하는 강의 신을, 하나 하나의 자본주의가 모여 마침내 썩게 한 강의 신을 씻긴다. 그것은 성실한 이들 묵묵히 자기의 일을 하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강의 신은 그러한 치히로의 행동에 보답이라도 하듯이 신비한 물질을 치히로에게 남긴다. 그 물질은 진실을 의미한다. 그 물질을 조작된 욕망의 흉물로 변한 카오나시에게 먹여 본래로 되돌리는 장면이 연출된다. 이것은 세상은 돈이 아니라 진실함으로 움직여가는 것이라는 사실을 말해주고자 함이다.

하쿠는 유바바에게 마술을 배우겠다며 자진해서 들어갔다. 여기에서 마술은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를 말한다. 하쿠는 우리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하쿠는 적극적으로 자본의 마술을 배우려는 캐릭터인 것이다. 반역을 꿈꾸기도지만 벗어날 수 없다. 그러나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는 자체 이익을 위해서 철저하게 이용만 할 뿐이다. 유바바는 하쿠를 철저하게 이용한다. 유바바는 그것을 알고 있으면서 전복을 꿈구며 따른다.

유바바는 하쿠에게 언니인 제니바의 도장을 훔쳐오게 시킨다. 도장은 서구의 또 다른 귄위와 정신을 도용하는 것을 말한다. 이는 일본사회와 자본주의의 근현대사를 말하려는 것이다. 개항이래 일본의 근현대사는 서구의 모방과 도용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치명적인 생명의 위협을 당하게 하고 하쿠는 유바바의 버림을 받게 된다. 이는 생명의 저버림이다.

치히로가 강의 신으로부터 받은 신비한 물질, 진실을 하쿠에게 먹인다. 그리고 카마지이(釜爺)의 도움으로 제니바에게 가게 된다. 도장을 주고 하쿠의 생명을 보장받기 위해서이다. 목욕 여관 주변은 이제 바다가 되었다. 자본주주의의 철옹성인 일본은 바다로 둘러싸여 있다. 그것은 단절을 의미했다. 카마지이의 말대로 사람들은 어느새 기차를 타고 떠나면서 돌아오지 않게 되었다. 그 땅을 버리고 돌아올 줄 모른다. 물이 찬 기차길 승객들은 모두 유령이고 가 간이역들은 외로움과 고독의 바다 위에 떠 있다.

마침내 제니바의 집에 도착했다. 그 집은 전형적인 마녀의 집이고 이는 서구 문화기호 즉, 서구를 뜻한다. 치히로가 찾아간 것은 서구에 대한 화해의 몸짓이다. 이를 통해 서구의 이성을 상징하는 제니바를 극단적으로 선하게 그리면서 잘 짜여진 상받기 용 작품의 구도를 보여준다. 또한 제니바를 합리적인 존재로 설정하고 이의 도움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는 일본의 나약한 지성사를 드러내 보이기도 한다.

우리에게 아니 일본의 현실은 누구일까? 치히로는 공포스런 공간에서 나온다. 그럼에도 하쿠는 마녀에게서 언젠가 벗어나겠다고 말한다. 항상 언젠가는 이라는 가능성은 희망이기도 하지만 한 없는 현재의 연장일 수도 있다. 하쿠는 그런 의미에서 일본의 우리의 자화상인지 모른다.

제니바의 말대로 마법을 통해 이루어진 것은 남는 게 없다. 우리는 마법에 빠져 끊임없이 무엇인가 이루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빠져들어 인간본성을 잃고는 있지는 않은가. 하야오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게 아닐까. 이를 통해 정체성을 회복하고 마녀 지배 이전의 과거로 돌아가고 싶은 것을 반영한 것일까. 꿈보다 해몽이다.

하니리포터 김헌식 /codess@lyco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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