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이야기

 
작성일 : 03-01-06 23:53
정승섭 화백이 그려낸 겨울 풍경들
 글쓴이 : 토토♬
조회 : 1,370  



134.0 x 56.0cm/수묵





291.0 x 218.2cm/수묵





182.0 x 121.0cm/수묵 





111.0 x 77.0cm/수묵 
 
 



240.0 x 148.0cm/수묵





171.0 x 51.0cm/수묵





240.0 x 95.0cm/수묵





?(사이즈가 잘못되어 물음표로 표시합니다)/수묵  





360.0 x 150.0cm/수묵 





137.5 x 150.5cm/수묵 





290.2 x 148cm/수묵





290.2 x 148cm/수묵 
 



▣ 정승섭 프로필

서울 미대 회화과 졸
동 대학원 졸


1962 - 1963 신인예술전 2회, 3회 장려상 수상
1962 - 1980 국전 입선 10회 수상(1,11,12,13,22,23,24,25,26,29,)
국전 특선 3회 수상(27, 28, 30)


1988,1992,1994 대한민국 미술대전 심사위원 3회 역임(7,11,13)
1986~ 전라북도 미술대전 심사 운영위원 역임
1988,1992 광주 한국화 특장대전 심사위원
1993 서울시립미술관 '한국자연대전' 운영위원
무등 미술대전 심사위원, 원 미술공모대전 운영위원
1995 서울시립미술관 '한국자연대전' 운영위원장
국립현대미술관 '한국전통산수화전' 추진위원

현 원광대학교 교수 



기다림의 여백 - 정승섭

나의 경우 그림이란 그리움을 표현하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무엇인가를 그리워한다는 것은 사람마다의 가치 기준에 따라 다소 차이는 있겠지만, 40여 년간 그림만을 그리면서 살다보니 그것은 어떠한 말이나 글이나 소리보다도 나에게는 가장 직접적인 표현 수단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언제 끝날지 모르는 끝없는 반복과 고행을 통한 깨달음의 과정 그 자체였다.
사람으로 태어나 한평생을 사는 것이 섬돌 위에 먼지가 잠시 앉았다가 바람에 날아가는 것과도 같다고 한다. 억겁의 세월 속에서 보면 천 년도 잠깐이라는데, 그래도 한획으로써 내 인생을 구분하여 주니 회고하기에는 아주 적당한 기회가 아닌가 한다.
반승반속의 어정쩡한 내 모습에 숱한 회한도 많았지만 오직 붓 하나만을 수행의 방편으로 삼아 부산스러운 마음을 평정하며 지금까지 살아왔다. 고경에 맹귀우목이란 말이 있다. 눈먼 거북이가 넓고 넓은 바다 가운데서 우연히 나무 토막을 만난다는 이야기인데, 이는 인간으로 태어나기 어렵고 불연을 맺기란 더더욱 어렵다는 것을 표현한 말이다
내 몸이 곧 부처의 그릇이요 마음은 곧 부처이니, 부처를 안고 태어난 지 60년이 되고 화필을 든 지 40년이 된다. 오직 화업을 천직으로 삼아 땀땀이 먹과 붓으로 정성을 다하여 오도의 길을 내 방식대로 살아왔다. 비록 출가의 신분은 아니지만 세속에 물들지 않으려 했고 한 톨의 시간도 아까워 했으니 내 마음 속의 부처에게도 부끄러울 것은 없다. 단지 앞으로 수행을 위해 남은 시간이 얼마나 더 허락되어 있을지 잠시 눈을 감고 생각해 본다.

불화불 돈화돈
부처는 부처를 그리고 돼지는 돼지를 그린다.

나의 작품 중에 성현들이 많이 등장한 때문만은 아니다. 작품 세계를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그렇다는 것이다. 성인의 첫 모습이 어찌 외양에 있을 것이며 , 산수의 진여가 어찌 한낱 형상에 있겠는가. 저간의 내 머리 속을 떠나지 못한 화두는 다름 아닌 수행이었다. 마음을 비우고 깨우침을 얻기 위하여 본시 공소일 수 밖에 없는 자연계를 그린다는 것- 무수히 점을 찍고 획을 치고 먹을 풀고...
누가 화선이라 했던가? 허심오도를 위한 끊임없는 작업은 곧 수행 그 자체였다. 그림 그리는 작업이 그렇고 그 결실 또한 수행의 결과물이었다. 그것은 깨달음의 징표였으며 마음 그대로의 반영이었다. 고인들이 그토록 일점일획을 중시한 까닭이 여기에 있지 않은가. 이번 전시에 2, 30년 전 작품들을 보이는 것이 비록 부끄럽지 않은 바는 아니나, 지금보다도 더 치열했던 당시의 수행 과정이 점점이 새겨져 있기에 이렇게 묶어 보았다. 옛 작품들을 꺼내 보았을 때, 내 마음은 형용할 수 없는 아픔으로 가득 차올랐다.
'저 수많은 점과 획 사이에 나의 젊음이 묻혀 있구나!'

무심한 독백 속에서 마치 나의 전생을 보고 있는 듯하다. 전생이 어찌 부끄러울 수 있는가. 그것은 지금의 나를 만든 작품들인 것을‥‥

광주의 김승천 옹은 참 희한한 분이다. 젊어서부터 서예와 동양화의 대가들을 찾아다니며 서화를 부탁하여 수집하고 살아온 자칭 걸사이고 부사이다. 언젠가 불쑥 나를 찾아와서 내생에 가서 나의 도승지 노릇을 해 줄테니 삼성도를 그려 내라는데, 내 못 그릴 바도 아니고 묘한 호기심과 충동마저 느껴져서 그때부터 수도 없이 석가, 공자, 예수를 그렸다. 덕분에 최근에는 단군과 달마도 즐거이 그리고 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 모든 일이 전생업이 무의식 중에 현생으로 연결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새 천년 정초에 함께 월전선생을 뵈러 갔을 때 선생께서는 "현림은 부처를 많이 그려서 앞으로 좋은 일이 있을 거야‥‥‥"라고 하셨다. 세상 보시중에 법 보시가 가장 크다고 했다. 부처를 그리고 싶어서 그렸지만 행여 그것이 법 보시가 된다면 이보다 더 큰 보람과 행복이 또 있을까? 지금은 북한 땅인 강원도 평강군 복계리에서 나는 태어났다. 백두대간의 준령이 남으로 흘러내려 금강산을 이루고 그 맥 하나가 서울의 북악으로 뻗어내린 중간 쯤 되는 곳이다. 수려한 산세와 맑은 물이 나의 유년기를 키웠었다.
소년 시절은 동해안 주문진에서 자랐다. 태백산의 노을이 지고, 오징어잡이 배가 나갈 때면 수평선 위로 둥근달이 떠오른다. 태풍이 불어 큰 해일이라도 몰아쳐 오면 동네 사람들이 바닷가로 나가 고기잡이 나간 식구들을 초조하게 기다리곤 했다. 그즈음 나는 내가 누구인가 나의 본체는 무엇인가 나는 산 속의 새, 물 속의 고기와 무엇이 다른가 모든 생명은 다 영혼이 있는가 하는 엉뚱한 의구심을 품으면서 자랐다.
나는 청년 시절을 서울에서 보냈다. 중동고등학교를 거쳐 서울대학교와 대학원을 거치면서 화가의 길로 정착하게 되었다. 마포중학교와 한성고등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하면서 가정도 꾸몄다. 그러나 당시에 나는 서울에서의 번잡스런 생활에 염증을 느껴 어디 조용한 소도시에 가서 원 없이 책이나 읽고 그림 그리고 사색하며 살고 싶었다. 인연이 닿아 원광대학교로 내려왔지만 처음에는 한 10년 공부하고 다시 서울로 상경할 예정이었다. 무엇이 나를 지금까지 30여 년 동안이나 이 곳에 묶어 놓았는가.

풍패지관, 옛 임금님의 고향이라. 전주 객사의 현판에 있는 글이다. 전주 지세의 특징은 동고서저, 남폐북개라고 한다. 동쪽이 높고 서쪽이 낮으며 남쪽이 막히고 북쪽이 터져 있다는 말인데, 이는 크게 보면 동아시아 대륙 전체와 감히 마주보고 있는 형국이다. 인구 50여 만의 작은 도시 전주가 히말라야와 천산산맥, 알타이산맥 등으로 둘러싸인 동아시아 대륙 전체와 감히 맞서고 있는 것이다. 어찌 제왕의 고향으로서 부족함이 있겠는가만은 단지 성군이 아쉬울 따름이다.

완만한 산과 졸졸 흐르는 냇물, 시원한 풍광은 내 산수화의 바탕을 제공하였고 넉넉한 인심은 30년 나의 전주 생활을 윤택하게 해 주었다. 본래 자연을 좋아해서 서울 생활에는 적응하지 못하고 내려온 주제에 그래도 몇 번씩이나 되돌아가고 싶은 고비도 많았었다. 그러나 그때마다 전주는 마치 심덕 좋은 아낙네처럼 나를 사로잡아 놓곤 하였다. 한 번은 모국립 대학에 있는 선배로부터 함께 있자는 제안을 받고 고심하고 있을때, 박길진 초대 총장께서 어찌 아셨는지 나를 불러 말씀하셨다
"우물을 파도 한 우물을 파야지, 여기저기 파면 흙탕물만 나온다. 남의 사정보다 갈보 될라." 거침없이 일갈한 그 말씀에 그만 오금이 저려 꼼짝을 못하였다.

화력 40년 동안 이미 여러 번의 크고 작은 전시회를 가졌다. 국전에 입선 10번, 특선 3번, 서울에서의 대형 개인전만 7회, 미국과 유럽에서 초대 개인전 10여 회,기타 각종 기획전, 초대전 등 숱한 전시회를 가졌으나 막상 전주에서는 이렇다 할 큰 전시회가 없었던 것은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이제 평소 아껴주신 주위 여러분들의 격려와 성원에 힘입어 화필 생활을 회고하면서 국립전주박물관에서 처음으로 전시회를 갖게 된 것을 무한한 기쁨과 광영으로 생각하고 사은님께 깊이 감사드리는 바이다


출처. http://www.artvil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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