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lla Lilies, New York, 1981
거의 매일 그녀를 봅니다. 맑거나 흐리거나 비가 오거나 눈이 내리는
것에 상관없이 그녀는 늘 그 자리에 앉았습니다. 그녀의 자리는 아파
트 상가 후문 한켠의 작은 의자가 있는 곳입니다. 그녀는 상가에서
나오는 폐상자를 주워 모으는 일을 합니다. 아니 그것만이 생활인 듯
도 합니다. 그녀의 남편은 아주 가끔씩 리어카를 끌고 와서 그녀가
차곡차곡 재어놓은 상자들을 싣고 어디론가 갑니다. 그녀는 남편을
보내고 다시 그 자리에 앉습니다. 다행히 그녀의 자리는 건물의 차양
안쪽이라 비나 눈을 피할 수 있습니다. 햇볕 매서운 날도 그 자리는
시원한 그늘입니다. 그런 그녀의 자리가 나에겐 조금이나마 위로가
됩니다.
Sunflowers, Santa Fe, 1981
그녀의 몸집은 비대합니다. 내 몸의 두 배는 족히 넘을 듯합니다. 그
래서 그녀를 지탱하고 있는, 포장마차에서나 볼 법한 동그란 작은 의
자가 참 위태롭습니다. 금방이라도 균형을 못 잡고 그녀와 휘청 넘어
질 것만 같습니다. 하지만 넘어지기는 커녕 갸웃거리는 모습도 아직
본 적이 없습니다. 그녀는 상자를 모으러 다닐 때가 아니면 늘 그 자
리에 있습니다. 몇 시쯤 상가에 와서 몇 시쯤 집으로 가는 지는 정확
히 모릅니다. 그녀는 내 눈에 보일 때만 나의 관심을 끄니까요. 그녀
의 눈길은 늘 먼-곳입니다. 하늘인지 먼 산인지 푸른 숲인지 그리운
고향인지... 그녀의 눈길을 따라가면 그 곳엔 잃어버린 희망이 낙엽
처럼 뒹굴 것만 같습니다.
Red Hot Pokers, Santa Fe, 1981
나는 6년 넘게 그녀를 봐 왔지만 그녀가 누군가와 말하는 것을 단 한
번도 듣지 못했고 보지 못했습니다. 그녀는 남편과 함께 있을 때도
묵묵히 리어카에 상자를 싣던 모습이었습니다. 나는 언제부턴가 그녀
의 말없음을 당연한 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녀는 말을 못하는 장애
인일 것이라고 지레 짐작했습니다. 늘 표정 없는 얼굴로 느릿느릿 움
직이거나 멍하니 그 자리에 앉아있는 모습은 그녀는 말만 못할 뿐만
아니라 생각도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습니다.
California Poppies, Santa Fe, 1982
며칠 전, 비 오는 날이었습니다. 우산을 받쳐들고 종종걸음을 치는데
누군가 다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약국 옆 그녀의 자리 근처였습니
다. 우산을 높이 쳐들고 소리나는 곳을 쳐다보니 내가 잘 아는 이웃
과 그녀였습니다. 이웃은 상가 한켠에 정리되지 않은 채로 쌓여있는
빈상자를 하나 가져가려다 그녀의 제지를 받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내가 짐작했던 아니 당연히 말 못할 것이라고 단정지었던 그녀는 화
가 잔뜩 나 있었습니다. 이웃을 쏘아보는 그녀의 눈빛이 얼마나 매섭
던지 난 또 다시 놀라고 있었습니다. 평소 먼 곳을 바라보던 그녀의
선량한 눈빛은 잠시 여행 중이었습니다.
Dutch Iris, Santa Fe, 1982
그녀는 말했습니다.
상가는 내 구역이다. 여기서 나오는 빈 상자는 모두 내 것이다. 그러
니 함부로 가져가면 안된다. 왜 남의 것을 말도 없이 가져가느냐고.
이웃은 말했습니다.
몰랐다. 미안하다. 하지만 이깟 상자 하나 가지고 너무 한 것 아니냐
고...
Tulips, New York-Dallas, 1983
우산을 낮게 드리우고 그들 곁을 모른 척 지나쳐 왔습니다. 몇 걸음
이나 걸었을까요...울컥 슬픔 같은 것이 밀치고 올라왔습니다. 맨살
에 닿는 빗방울에 오슬오슬 소름이 돋고 몸이 추워졌습니다. 내 잣대
로 생각하고 단정지었던 선량한 눈빛의 그녀는 어디로 갔는지요. 누
구에게나 사는 것은 만만한 것이 아니지만 그녀에게 삶은 본능이었습
니다. 내 것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몸부림과 먼 곳을 바라보던 그 눈
빛은 하나였습니다. 고물상에 갖다줘도 빈 상자 하나에 고작 몇 십원
쳐줄 것이지만 그녀에게 있어 상자는 그녀가 삶을 지탱하는 수단이라
는 것을 단순한 나는 그때서야 새삼 되느꼈습니다.
Bird of Paradise + Greek Dendron,
Dallas, 1982
며칠동안 그녀를 못 보았습니다. 아니, 내가 상가 후문 쪽으로 지나
가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오늘도 작은 의자에 힘겹게 몸을 지탱하고
그 자리에 앉았을까... 궁금하지만, 한동안 그녀를 보지 않았으면 합
니다. 나도 몰래 연민의 눈길이 그녀를 향할까 조심스럽기도 하고 먼
곳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길이 예전과 다르게 다가올까 두렵기도 한
때문입니다. 어쨌거나 그녀에겐 참 미안한 일입니다.
2003. 5. 9. 淸顔愛語
Rose and Orchid, Dallas, 1983
가난한 사랑의 노래
가난하다고 해서 외로움을 모르겠는가
너와 헤어져 돌아오는
눈 쌓인 골목길에 새파랗게 달빛이 쏟아지는데
가난하다고 해서 두려움이 없겠는가
두 점을 치는 소리
방범대원의 호각소리 메밀묵 사려 소리에
눈을 뜨면 멀리 육중한 기계 굴러 가는 소리
가난하다고 해서 그리움을 버렸겠는가
어머님 보고 싶소 수 없이 뇌어보지만
집 뒤 감나무에 까치밥으로 하나 남았을
새빨간 감 바람소리도 그려보지만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내 볼에 와 닿던 네 입술의 뜨거움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네 숨결
돌아서는 내 등 뒤에서 터지던 네 울음
가난하다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가난하기 때문에 이것들을
이 모든 것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詩 신경림
Sweetpea and Pin Cushion, Dallas,
1983
사진 : 월터 넬슨 (Walter W. Nelson)
출처: cafe. 그림을 배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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